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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 , 시사,노동/과거사 바로잡기,적폐청산

근로자의날(5월1일)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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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6년전 자본가들의 음모, 헤이마켓 광장 >

1886년 5월 1일. 8만의 미국 시카고 노동자들과 가족이 미시간 거리로 나섰다.

이들은 당시 하루 12~16시간의 고된 장시간 노동에 대항하며 ‘8시간 노동’ 쟁취를 위해 전국적인 파업을 전개했다.

장시간 노동의 대가는 고작 주급 7~8달러. 이 주급으로 10~15달러의 판잣집 월세를 감당하며 생활까지 해야 했다.

반면 자본가들은 다이아몬드로 만든 이빨을 자랑하고 100달러 지폐로 담배를 말아 피우는 호화스러운 삶을 누렸다.

 

5월 1일, 노동자들이 외친 8시간 노동 쟁취 투쟁은 공장의 기계를, 굴뚝의 연기를 멈추며 노동자가 멈추면 세상이 멈춘다는 사실을 자각시켰다.

그러나 자본가가 꾸민 헤이마켓 광장 폭발사건으로 노동운동 지도자 8명이 재판에 넘겨졌고, 4명이 교수형으로 목숨을 잃었다.

사형을 당한 노동운동지도자 어거스트 스파이스의 ‘하나의 불꽃은 짓밟아도 들불은 끌 수 없다’는 법정 최후 진술은 지금도 많은 사람에게 읽히고 있다.

이와 같은 역사적 투쟁 정신과 노동운동지도자들의 희생을 기억하며 4년 뒤인 1890년부터 매년 각 국가들이 5월 1일 메이데이(노동절) 투쟁을 이어오고 있다.

 

< 노동자가 멈추면 세상도 멈춘다 >

1886년 5월 1일 미국 시카고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은‘노동자가 멈추면 세상도 멈춘다’는 것을 세계에 알리고 노동자의 힘은 실로 막강함을 확인케 했다.

그런데 파업과 시가행진에 나선 노동자들을 향한 미국 정부의 대응은 경찰의 실탄 사격이었다. 5월 3일, 파업농성 중인 6명의 노동자와 어린 소녀가 경찰이 쏜 총알에 목숨을 잃은 것.

다음 날 경찰 만행을 규탄하는 30만의 노동자와 시민이 시카고 헤이마켓 광장에 운집하여 평화집회를 열었다.

이때 누군가에 의해 폭탄이 터졌다. 이를 신호로 경찰은 미친 듯이 몽둥이를 휘둘렀고 광장은 핏빛으로 변했다. 이를 빌미 삼아 노동운동 지도자들은 폭동죄로 체포되어 4명은 교수형, 1명은 감옥에서 자살, 나머지 3명은 장기형을 살다 석방되었다. 이들이 바로‘시카고 8인’이다.

훗날 헤이마켓 광장에 폭탄을 던진 것은 8시간 노동 쟁취 운동을 없애려는 독점 자본가들이 뉴욕에서 파견한 음모자들이 저지른 일로 밝혀졌다.

그리고 당시 구속 또는 사형된 노동운동가들이 모두 무죄임이 증명되었다. 세계 노동운동사에 뚜렷이 자취를 남긴 헤이마켓 사건은 8시간 노동을 쟁취하기 위한 미국 노동자들의 위대한 투쟁이었다.

 

< 일제시대 노동절 역사 >

한국 최초의 노동절 1923년 일제 식민지 시절, 당시 노동자의 자주 조직인‘조선노동연맹회’주도로 처음 시작했다.

약 2천여 명의 노동자가 △노동시간 단축 △임금인상 △실업방지 등을 주장하며 파업, 강연회, 시위 등을 진행했다.

노동절 투쟁은 1945년 해방 전까지 일제의 탄압에 굴하지 않고 완강하게 유지되었다.

해방 뒤에는 1945년 결성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의 주도로 1946년 20만 노동자가 참석한 가운데 메이데이 기념식을 성대하게 열었다. 

이승만, 대한노총의 노동절 1957년 이승만은“메이데이는 공산 괴뢰도당이 선전 도구로 이용하고 있으니 반공하는 우리 노동자들이 경축할 수 있는 참된 명절이 제정하라”고 대한노총에 지시했다.

이승만의 지시가 떨어지기 무섭게 대한노총은 노총 결성일인 3월 10일을 노동절로 결정했다.

대한노총의 어용성으로 메이데이는 순식간에 빼앗겼고, 3월 10일은 출세와 노동자 민중의 뜻과 상관없이 대한노총 상층부가 이승만과 자본가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날이 되었다.

 

< 해방이후 노동절 역사 >

박정희, 이름마저 ‘근로자의날’로 바꾸고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는 노동절 이름마저 근로자의날로 바꿨다.

주체적인 노동자가 아니라 아무 생각 없이 일만 하는‘근로자’가 필요했던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이 그 이름마저 변경한 것이다.

노동자에게 산업역군이라며 허울 좋은 이름을 씌우고, 현실에서는‘공돌이, 공순이’라 부르며 정부와 자본의 들러리로서는 ‘근면하게 일하는 노동자’ 이데올로기를 강요했다.

 

1989년, 노동절 회복을 선언하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민주노조 운동은 단위노조에서 지역, 업종을 넘어 전국으로 들불처럼 확산되었고‘노동법 개정 및 임금인상 투쟁본부’를 결성했다.

투쟁본부는 1989년 100번째 메이데이를 앞두고‘노동절 전통 회복’을 선언했다.

박정희가 만든 근로자의날을 노동자 불명예의 날로 규정하고 굴욕에 찬 지난날의 근로자 인생 청산을 알린 것이다. 

1994년, 날짜를 되찾다, 그러나… 정부의 기념일과 무관하게 1989년부터 노동자들의 메이데이가 5월 1일에 개최되자, 김영삼 정부는 5월 1일로 노동절 날짜를 회복시켰다.

하지만 여전히 5월 1일은 ‘근로자의날’이다.

독재정권과 자본이 일방으로 바꾼‘노동절’이름을 되찾아야 하는 과제는 2022년에도 남아 있다.

1994년 이후 민주노총은 해마다 노동절과 전태일 열사 정신계승일(11월13일)에 노동자 권리 쟁취를 위한 투쟁을 힘차게 전개하고 있다.

※ 출처 : 민주노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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