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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 , 시사,노동/과거사 바로잡기,적폐청산

4.3 민중항쟁 계기, 배경, 과정. 의미, 우리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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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민중항쟁은 미군정기 '분단을 기정사실화하는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거부하고 통일을 원한 제주민중의 저항'에 대해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가 대규모 학살을 자행한 한국근현대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다.

 

< 김경훈 시인 '아무런 이유 없이' 中 >

1947년 3월 1일의 그 거대한 군집의 운동을

뒤이은 3.10총파업의 열정을

나라 반쪽 만드는 5.10단독선거를 저지한 동력을

우리는 그 4.3의 봄을 애써 잊고 있는가

(중략)

제주4.3은 아무런 이유없이 억울하게 죽은 것이 아니라

죽어서 아무런 이유가 없어져버린 것이 억울한 것이다

 

< 일본군 요새로 전락한 제주도 >

1945년 4월 미일전쟁에서 패색이 짙어가던 일본군은 1945년 2월부터 일본 본토 사수를 위해 일본 내 6개 지역과 제주도 등 모두 7개 지역에서 결호작전을 준비한다. 제주도는 바로 일본 본토 사수를 위한 ‘대미 결전의 최후의 보루’였다. 이를 위해 일제는 제주도민을 강제 동원하여 곳곳에 비행장을 만들고 해안마다 굴을 파는 등 군사기지를 건설했다.

제주도민에게 해방은 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났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었다. 그것은 ‘죽음으로부터 해방’을 뜻했다,

 

< 자치의 열망으로 뜨겁게 달아오른 제주 >

9월 9일, 서울 중앙청에 일장기가 내려지고, 성조기가 게양되면서, 미국군사정부, 미군정 통치가 시작되었다. 비록 미군정의 점령이 시작되었지만 조선의 민중은 건국준비위원회를 중앙인민위원회로 명칭을 바꾸며 자주독립국가 건설에 적극 나서게 된다. 제주도 마찬가지였다.

 

< 3.1절 기념대회 발포사건 >

미군정과의 충돌이 본격화 된 것은 1947년 3월 1일, 소위 ‘3.1절 발포사건’이다. 흔히 이 사건을 4.3항쟁의 도화선이라고 말한다.

 해방이 되었지만 외세에 의한 분단으로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불안감을 가진 도민들은 조선의 통일독립과 진보적 민주국가 건립을 위해 28주년 3.1절 기념대회를 개최했다. 미군정은 이날 시위를 불허했지만, 몰려드는 도민들을 막아낼 수 없었다.

 대회가 끝나고 곧바로 가두시위가 시작되었는데 시위대가 관덕정을 거쳐 나간 후 관덕정 부근에 있던 미군정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채여 어린 아이가 다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런데 기마경찰이 그대로 가려하자 주변의 군중들이 소리를 지르고 항의를 했다. 바로 그때 관덕정 앞과 경찰서 망루위에 있던 미군정 경찰들이 무차별적으로 총격을 가하기 시작해 이 총격으로 6명이 죽고, 8명이 부상을 입었다.

 

< 제주 95%노동자가 참여한 3.10 총파업 >

이에 분노한 제주도민들은 3.1.사건 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미군정에 ‘발포책임자 처벌과 경찰수뇌부 해임, 피해 보상과 연행 인사 석방, 경찰 무장해제와 경찰 내 친일 민족반역자 축출’을 요구하며, 3.10. 정오를 기해서 총파업에 돌입할 것을 결정한다.

 3월 10일 제주도청을 시작으로 3월 22일까지 13일간 관공서, 학교, 통신기관, 금융기관, 교통기관, 발전소, 공장 등 전체 기관의 95%인 156개 기관단체, 41,211명이 참여한 제주도민 총파업이 진행되었다. 학생들은 동맹휴업을 하고, 노동자들은 기계를 멈추고, 공무원들을 행정을 멈추고,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은 철시하고, 길거리의 상가는 문을 닫았다.

이처럼 3.10 총파업은 통일독립과 진보적 민주주의 실현을 염원하는 민중을 학살하고, 탄압한 미군정에 항거한 민중항쟁이며, 노동자 민중이 하나가 돼서 싸운 세계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민관 총파업이었다.

 

< 서북청년회와 ‘레드아일랜드’ >

 제주도민들의 3.10총파업에 미군정은 제주도민의 의견을 듣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억압하여 사태를 해결하고자 했다. 경무부 수뇌부는 제주도를 ‘빨갱이 섬’으로 규정하고 대대적으로 선전하였으며 3월 15일에는 파업 주동자에 대한 검거령을 내렸다. 본토에서 온 응원 경찰과 서북청년회가 빨갱이를 소탕한다는 명분 아래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연행, 투옥, 고문을 했고 심지어 금품을 갈취를 위해 일부러 죄인을 만들어 내는 등의 백색 테러를 계속하였다. 검속 한달 만에 500여 명이 체포되고 4.3 직전까지 1년간 2,500명이 구금되었다.

 

< 1948년 4월 3일-‘탄압이면 항쟁이다’ >

 1948년 4월 3일은 남쪽만의 단독선거인 5.10 선거를 한 달 가량 앞둔 시점이었다. 서북청년회의 폭력은 법 위에서 군림했고, 여기에 남쪽만의 단독 선거는 사태를 더욱 불안한 쪽으로 몰고 갔다. 둘로 쪼개진다면 전쟁이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그걸 막기 위해 무장대들은 ‘탄압이면 항쟁이다’라는 깃발을 내걸고 ‘단선·단정 반대’, ‘응원 경찰과 서청의 추방’을 주장하여 제주도 내 24개 경찰지서 중 12개를 습격했다. 얼마 후 5월 10일, 38도선 남쪽의 한반도에서는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가 치러졌다.

제주도는 남한에서 유일하게 5·10 단독선거를 거부하고 한라산에 올랐다. 이로 인하여 단독선거를 추진해 온 미군정은 제주도를 눈의 가시로 여겨 5·10 선거가 저지된 직후 군 병력과 응원경찰력을 더욱 강화해 제주도민을 집단 학살하기 시작했다. 이런 미친 세월은 다음 해인 1949년 봄까지 지속됐다.

 

< 한국전쟁과 예비검속 >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집단 학살은 다시 자행되었다. 4.3에 연루되어 육지에 수감되었던 사람들은 대부분 처형되었고(1950년 7월) 훈방되었던 사람들도 예비검속에 의해 집단으로 학살되었다.(1950년 7월∼9월) 그렇게 공권력에 학살당하던 제주는 1954년 9월 21일 제주도 경찰국장이 한라산 금족령을 해제하고 지역 주민들에게 부과했던 마을성곽 보초 임무를 폐지함으로써 4·3발생 6년 6개월만에 외면상 평시 체제로 환원되었다.

 

4.3항쟁은 완전한 해방과 분단을 저지하기 위한 제주도민의 항쟁이었다. 4.3항쟁이 진압되면서 분단은 고착화되었다. 그리고 그 진압의 주체는 미군정과 대한민국 정부였다.

민주노총은 3만 여명의 무고한 도민이 죽음을 강요당한 제주 4·3의 비극적인 역사로만 남기지 않고 우리민중의 항쟁을 진압하고 학살한 미국에게 책임을 묻고 완성하지 못한 통일조국을 위해 전진해 나갈 것이다.

 

< 4.3항쟁의 현재적 의미와 우리의 역할 >

식민지 한반도를 발판삼아 중일전쟁의 희생양이 되었던 역사를 반복할 수 없다. 현재 미국에게 한반도는 북한의 위협에 대응한다는 명목 하에 중국과 러시아를 동시에 견제할 수 있는 전략 거점이자, 동북아 최고의 전략적 요충지이다. 한미동맹 또한 그 맥락에서 강화되고 있다. 일본의 병참기지였던 한반도가 이제는 미국의 병참기지가 될 수 있는 정세 속에 놓여있다. 강정해군기지, 평택 캠프 험프리스, 오산공군기지, 사드 배치, 수십곳의 주한미군기지 등 한반도 곳곳이 미국의 인도태평양전략을 위한 전초기지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뿐만아니라, 일본은 다시 전쟁할 수 있는 나라를 꿈꾸며 평화헌법을 개정하려 하고 있다.

 우리는 1945년 완성되지 못한 해방과 통일을 위해 4.3항쟁 정신과 3.10총파업 정신으로 투쟁을 준비해야 한다. 외세를 반대하고 노동자민중이 주인되는 나라를 꿈꾸었던 제주민중들의 열망을 다시금 되새기어야 한다.

 

※ 출처 : 민주노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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